REVIEW 안진국 Lev AAN / Jinkook Ahn
미술평론가 Art Critic
하이브리드 화석학: 뒤섞임에 관한 지구 차원의 이야기 경기문화재단 x 수원시립미술관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x Suwon Museum of Art
Dec 2025 결과도록 수록
Printed Cataloge Available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Sein-zum-Tode)”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삶을 다함’까지 기다리지 않고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볼 수 있는 존재다. 인간에게 죽음은 현존재(Dasein)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손희민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사유하면서 하나의 물음에 이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인간을 넘어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서 생명 일반으로 사유를 확장하게 만든다. 다만 손희민의 시선은 하이데거와 궤를 달리한다.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죽음을 호출했다면, 손희민은 미래에 닥칠 생명의 소멸, 즉 상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작가는 한 개인에게 막중한 무게를 갖는 ‘인격적 사건’으로서 죽음에 머물지 않고, 생명 일반의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본다. 그 과정에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상실의 표증인 ‘화석’과 소멸을 맞서는 방식으로 끝없이 형태를 바꾸는 ‘진화’였다.
손희민은 생명체를 “물질을 지님으로써 유한성을 지닌 필멸의 존재, 생존하고자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안쓰럽고 처연한 존재”라고 말한다(작가노트). 그의 작업은 인간·비인간·기술이 얽힘을 물질로 조율하는 실험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생(生)을 붙드는 애착과 죽음을 향한 애도가 흐른다. 그의 작업이 화려하지만, 처연한 정조를 지닌 것도 이 때문이리라. 작가에게 ‘미래’는 다가올 죽음의 시간이고, ‘화석’은 죽음의 흔적이며, ‘뒤섞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손희민은 살아남으려는 존재의 안간힘과 기술적 환경이 감각과 언어를 바꾸어 놓는 현실을, 화려함과 처연함이 교차하는 한 덩어리가 지닌 생명의 태도와 변형을 보여준다.

미래 화석: 카이로스의 시간성

생명이 물성과 형태로 드러나는 가시적 존재인 생물은 필멸성 때문에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온 변형의 역사가 새겨진 존재다. ‘진화’라고 불리는 수많은 변형의 변곡점은 손희민에게 가상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갈 계기로 작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업이 생물학을 기반으로 가설과 추정을 거쳐 가상의 생물 표본과 화석을 만들었던〈생물 조각〉시리즈(2022~2023)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서 생물의 기원과 진화를 주목했다. 최근 그가 선보인 〈미래 화석〉시리즈(2024~)는 이 연장선으로, 화석의 속성을 통해 기원과 진화를 넘어서 그것이 지닌 ‘뒤섞임’에 주목한다.
화석은 단지 고대 생물의 흔적이 아니다. “드러내기 전에는 숨겨진 돌, 추정의 시나리오를 담은 이야기의 돌”이다(작가노트). 생물과 광물, 중력과 풍력이 뒤섞인 시공간을 품고 있으며, 연마로 생물의 형태를 복원하는 인간의 조형 기술이 얽혀 있다. 이러한 화석은 삼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는 과거 생물의 표본, 둘째는 암석화된 무기물로서의 물질, 셋째는 연마와 절개라는 기술의 흔적이다. 즉 화석은 생명·물질·기술이 중첩된 혼종체다. 과거의 유기체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화석은, 발굴을 통해 현재성을 얻고, 복원되는 순간부터 ‘가상적 생명’을 획득한다. 화석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이미’(과거) 존재하지만, 발굴되기 전까지 ‘아직’(미래)인 시간적 긴장을 내포한 ‘임의적’ 시간의 산물이다.
여기에 ‘미래’가 덧붙으면, 의미는 중층화된다. ‘미래 화석’은 미래에 발굴될 화석이자, 동시에 미래에 생성될 존재의 화석을 가리킨다. 이는 〈미래 화석〉이 영적이고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 시간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선형적인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과 순환적 영원성의 시간인 아이온(aion) 사이에 존재하는 카이로스는,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건적·창조적 순간의 주관적 시간이다. 〈미래 화석〉은 이 카이로스의 시간성, 즉 ‘이미(already)’와 ‘아직(yet)’이 중첩된 시간성을 품는다. 작가는 ‘화석’이라는 메타포를 매개로 과거와 미래의 생명과 시간을 사유하면서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만나는 ‘카이로스의 순간’을 포착한다.

공생-공존-생식

손희민은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그녀의 아들 도리언 세이건(Dorian Sagan)의 저서 『공생자 행성(Symbiotic Planet)』(마굴리스 저),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공저), 『린 마굴리스』(세이건 저) 등에서 제시된 이론과 철학을 자신의 조각적 방법론과 연결한다. 특히 상이한 원핵생물이 생존을 위해 공생적으로 결합해 진핵생물로 진화했다는 혁신적 가설인 마굴리스의 ‘세포 내 공생설(endosymbiotic theory)’에 영감받아, ‘공생, 공존, 생식(生殖)’이 산출하는 탈 구축과 변형, 그리고 그 과정에 내재한 우연성과 창발성을 조형화했다.
이 방법론은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의 〈뒤섞인 시나리오(Entangled Scenario)〉 프로젝트(2025)에서 구체화됐다. 그는 과학적 고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물의 세포 분열, 공생, 생식, 죽음, 화석이라는 진화의 복합적 얽힘을 조형적으로 구현한 〈미래 화석〉 시리즈 3점을 제시했다. 〈소화되지 않은(Undigested)〉(2025)은 단세포에서 다세포, 원핵에서 진핵으로의 이행을 ‘세포 내 공생설’을 전유해 조형 언어로 번역한 작업으로, 인공물과 자연물을 혼합한 재료 체계 위에 운지버섯을 부착해 공생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지의류나 따개비 등 이종 공생체의 색과 질감을 차용해 합병·융합·흡착을 생리적으로 체감하도록 했다. 함께 제시된 <입, 항문, 골격(Mouth, Anus, Skeleton)>(2025)은 선구동물과 후구동물의 분기를 대비시키고, 외골격과 내골격의 계통적 차이를 관(통) 구조와 외피·내피의 물성 대비로 시각화한 작업으로, 다양한 생물종의 색감과 질감을 반영해 생명체의 진화적 분기가 구조 변화로 이어짐을 드러냈다. 성염색체의 분열이 다양성과 적응력을 높이는 반면 유한성을 불러왔다는 진화의 아이러니를, 사랑과 죽음의 모티브로 재해석한 <사랑이 낳은 죽음(Love-Born Death)>(2025)은, 앞선 두 작품의 주요 형태(구형·관형)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자손’의 형상이다. 작가는 성의 도입이 노화와 자연사를 촉발했다는 서사를 ‘사랑’이라는 정동으로 재명명함으로써 생식–죽음–진화의 상호 의존성을 보여준다.
이 같은 〈미래 화석〉 시리즈는 생물적 차원을 넘어 매체적 차원에서도 ‘공생, 공존, 생식’의 절차를 채택한다. 작업 과정에서 연구자료·인간·AI가 ‘AI/연구자료 → 인간(강동호) → AI(정묵호) → 인간(손희민)’으로 이어지는 얽힘을 구성하며, 공존·공생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조각으로 재생산(생식)된다. 이 과정은 먼저 시인이자 화가인 강동호가 손희민의 자료(기존 작품 및 답사 이미지)와 마굴리스의 공생 이론 등에서 도출한 개념을 기반으로, AI의 대형 언어 모델(LLM) 방식을 참조해 개인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언어 감각을 결합한 텍스트 프롬프트를 생성한다. 이어서 AI 테크니션 정묵호가 이 프롬프트와 손희민의 자료를 AI 모델(Stable Diffusion)에 입력해 새로운 AI 이미지를 산출한다. AI의 빅데이터(대형 언어 모델)를 현대 인식을 집약한 ‘현대의 에피스테메(epistēmē)’라고 보는 손희민은, 이렇게 산출된 이미지를 동시대 인식 체계가 투영된 산물로 간주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손희민은 이 AI 이미지의 다양한 특성(유사, 상동, 글리치, 할루시네이션 등)을 감각적으로 차용해 조각 작업으로 조직화한다. 이때 작가는 자신을 AI의 비가시적 산출을 현실로 매개하는 존재, 즉 ‘영매/무당’에 비유한다. (영매·무당은 영어 ‘medium’으로, 매체, 매개, 중간, 재료 등의 뜻이기도 하다. ‘사이’에서 연결해 주는 존재를 가리킨다.)

자연-인공-무속-기술의 뒤섞임과 포스트-네이처(Post-nature)

‘공생, 공존, 생식’이라는 생물학적 행위는 ‘뒤섞임’의 현상이다. 작가가 구상한 뒤섞임의 시나리오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추정해 가는 생물학 서사의 감각, 시공간과 광물·생물이 중첩된 ‘화석’의 층위, 마법·종교·철학·과학이 교직 된 16~18세기 서구의 인식 지형, AI가 산출하는 유사성과 상동성의 감각, 정동과 정념이 사물과 자연에 깃든 인류의 무속적 행위 등을 포괄하는 지구 차원의 이야기다. 그가 진화와 화석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인간의 무속적 태도와 융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는 죽음과 이에 맞선 생의 의지가 빚어낸 처연함을 예술적 영매/무당으로서 세상에 드러낸다. 이를 위해 단순한 과학적 설명을 넘어, 생사, 생명, 존재에 관한 인간의 전통적·비과학적 이해를 동시대 기술, 조각의 물성, 무속 사운드와 조우하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한다. 특히 무속 음악과 사운드를 결합해 생명과 죽음에 대한 감성을 작품 전반에 흐르게 한 것은 작가가 매체적 ‘영매/무당’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파래소’의 무속 음악 이 조각 작업과 조우하도록 사운드 디자이너 신보경이 재창작한 소리는, 무녀의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만든 생물의 울음소리로 변형되는 상황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기술 사이의 경계에 의문을 품게 한다.
이 뒤섞임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이는 손희민이 처음 가졌던 물음이다.) 사실 생명의 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페란도(Francesca Ferrando)는 생명이 “변화하는 규범에 근거한 특정한 종에 한정된 개념이며, 문화와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varela)는 『앎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1987)에서 “스스로 재생산이 가능하되 철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기계가 발명된다면 그 기계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이렇듯 ‘생명’의 개념은 확정되기 어렵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래 화석〉 시리즈는 전통적인 자연과 인공의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포스트-네이처(Post-nature)라는 감각을 호출한다. 포스트-네이처는 인공·기술·자연이 혼합된 ‘뒤섞임의 자연’을 의미한다. 바로 생태계와 유전적 변형, 현대 기술이 뒤엉킨 장(場). 손희민은 최초의 다세포 생물부터 인공물까지 ‘주름’이라는 형식으로 엮어, 산업 재료로 생물 내장 기관을 상징하는 유기적 형상을 구축하고, 촉수는 PVC 호스로, 그물 조직은 인공 망사체로 상동적 구조와 결합하여 진화적 목적을 재조명한다. 또한 점액질이 가진 윤택을 아크릴 레진으로 재현한다. 결과적으로 생명과 인공의 상동성, 유사성을 전면화함으로써 곧 다가올(미래) 포스터-네이처의 세계를 표본화/화석화(과거)한다. 〈미래 화석〉은 생명과 무기물, 과거와 미래, 기술과 자연이 얽힌 포스트-네이처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은유인 것이다.
〈뒤섞인 시나리오〉에서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시간대에서 솟아난 기관들이 서로 뒤섞여 하나의 조각으로 응결한다. 생존을 위해 신체의 물성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는 생물의 변화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유기체와 환경이 맞물려 공진화하는 거대한 서사이다. 작가는 인간이 생물의 기원과 변화를 추정하는 데에 품는 서사적 감각을 〈미래 화석〉에 녹여낸다. 여기서 ‘시나리오’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다. 생명이 자신을 표출하는 방식이며, 미완의 생명에 향한 상상의 문을 여는 움직임이다.
〈미래 화석〉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에 바치는 애도의 시나리오다. 작품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 속에 놓인 ‘화석’이다. 사라짐에 대한 정념을 끌어안고, 잔존과 소멸의 경계를 왕복한다. 손희민이 들려주는 시나리오에는 뒤섞임의 리듬 속에서 생명력의 순간들이 포착된다. 유한하지만 아련한, 그래서 더욱 눈부신 생명력과 처연하지만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은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상기한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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